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얕고넓은 이야기

삼국시대 고구려의 역사

by 유한시 2022. 7. 17.

 

고구려 또는 고려는 삼국시대 세 나라 중 서기 668년까지 북쪽에 위치해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를 지배했던 군주제 국가입니다. 고구려는 기원전 37년 주몽이 이끄는 부여에서 남하한 추모 일행이 부여 남쪽의 압록강 상류 홀본성에 정착하여 고구려를 세웠다고 하는데요. 한족과의 투쟁 과정 속에서 점차 세력을 확대한 고구려는 유리왕 때에 이르러 전한의 뒤를 이어 일어난 신나라와 충돌할 정도로 그 세력이 성장하였습니다. 태조왕 때부터는 약탈 내지 점진적인 압박 전략이 주를 이루어 동예와 옥저를 복속시키고, 낙랑군과 현도군을 정복해 영토를 넓혔습니다. 고국천왕은 왕위의 부자상속제를 마련하고, 5부의 행정구역을 설정하는 등 체제 정비를 단단하게 잡고 실행하여 왕권의 강화를 이루었습니다.

4세기 초, 미천왕은 서안평을 확보하고 팔왕의 난으로 대표되는 중국 서진의 혼란에 편승해 낙랑군과 대방군을 정복하여 한반도에서 한사군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 고조선의 옛 땅을 회복하고 과거 위만조선에 속했던 모든 집단들을 통일했습니다. 이후 고국원왕 때 백제와 전연의 공격으로 일시적인 국가적 위기를 겪었으나,
고구려 소수림왕 때 태학을 설립하고, 불교를 국가적으로 받아들였으며 율령을 반포함으로써 중앙집권국가를 완성시키고 다시 나라를 정비하였습니다.

5세기에는 고구려의 전성기가 찾아오게 됩니다. 광개토대왕 시절, 숙신과 동부여를 복속시켜 만주와 한반도에서 우월한 위치를 확보하였는데요. 우선 남쪽에서 잦은 침공으로 성가시게 굴던 백제를 공격하여 수도 한성 위례성을 점령하여 아신왕의 굴욕적인 항복을 받아내고 여러 왕족과 귀족을 볼모로 잡아갔으며 남쪽 영토를 임진강과 한강까지 확장시켰습니다. 또한 요서 지방의 후연과는 적대적 관계였는데, 광개토대왕 시절 북으로 후연을 쳐서 요동을 차지하여 완벽히 무너뜨리고 아울러 요서 지방의 일부까지 진출하였습니다.

399년에는 광개토대왕에 원한을 품고 있던 백제 아신왕이 주도한 백제, 왜, 가야 연합군이 남해안 지역에서 신라를 침공하자, 우호관계에 있던 신라 내물 마립간의 요청을 받아들여 원군을 파병해 낙동강 하구에서 백제, 왜, 가야 연합군을 격파했고, 이후 한동안 신라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등의 공업을 세웠습니다. 404년에 백제, 왜, 가야 연합군이 고구려 대방과 평양을 공격하자 4년 전처럼 친히 군대를 이끌고 그들을 처단했죠.

그의 아들인 장수왕은 중국이 남북조시대에 들어가자 북위, 동진, 송, 제랑 모두 외교 관계를 맺어 중국을 견제하고 백제를 고립시키는 전략을 구사했습니다. 더불어 427년 남하정책의 일환으로 수도를 평양으로 천도하여 중앙 집권적 정치기구를 정비하였죠. 475년에 백제의 수도 한성을 공격, 함락시키고 그 왕인 개로왕을 죽여 고국원왕의 한을 풀고 남쪽의 아산만(牙山灣)까지 지배하여 일시적으로 백제를 멸망시키는 데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또한 북방에서는 유연과의 국경을 획정하고 북연의 잔당을 수습하는 등 남북조의 나라들도 무시하기 힘든 그들조차 긴장하게 만들 정도의 국력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후 장수왕의 손자 문자명왕과 그 뒤를 이은 안장왕 때까지 고구려의 황금기인 최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하지만 전성기 이후 6세기 중반에 들어서 왕위 계승을 둘러싼 다툼과 귀족들의 권력 암투로 내우 외환에 시달리던 고구려는 국력이 크게 쇠퇴하기 시작합니다. 더불어 신라의 진흥왕은 나제동맹을 깨고 고구려에게서 빼앗은 한강 유역을 독차지하였으며, 지금의 함경도 지역 일부에까지 진출해 고구려를 압박하였죠. 대외적으로는 만주의 거란, 속말말갈, 실위 등 여러 부족들을 사이에 두고 돌궐과 세력 다툼을 벌였습니다.

고구려는 만주를 놓고 벌인 돌궐과의 싸움에서 끝내 승리하며 평원왕, 영양왕대에 이르러 중흥기를 맞이하게 되는데요. 589년 중국에 새로 들어선 수나라는 이런 고구려를 견제해 4차례에 걸쳐 침공합니다. 고구려-수 전쟁에서 고구려는 612년 을지문덕을 비롯한 명장들의 활약에 힘입어 살수 대첩과 같은 중요한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수나라의 침공을 막아낼 수 있었고, 이 전쟁은 수나라의 멸망의 요인 중 하나가 되죠.

수양제의 침입이 끝나고, 고구려에는 연개소문을 중심으로 하는 강경한 정권이 생겨나, 중국의 새 왕조 당과 저자세였던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앉혀 수를 뒤이어 일어난 당나라와의 전쟁을 준비합니다. 곧이어 중국을 통일한 당나라의 태종은 연개소문의 대당강경책을 구실로 고구려를 침입하여 요동성 등을 함락시키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으나 안시성에서 성주 양만춘에게 대패합니다. 이처럼 고구려는 중국 세력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냈으나, 20년을 넘게 공격을 받으며 국력이 쇠퇴해갔다. 결국 연개소문 사후 아들들끼리 권력 상쟁이 이어지며 지배층이 분열되어 정치 상황이 어지러웠고 민심이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668년, 나당연합군은 이렇게 혼란해진 고구려를 공격하여 수도인 평양을 차지하고 고구려는 끝내 멸망하고 맙니다.

 


고구려(高句麗) 또는 고려(高麗)
기원전 37년 ~ 서기 668년 9월 21일 (704년)

기원전 37년 건국
3년 국내성 천도
194년 진대법 시행
311년 서안평 점령
313년 낙랑군 정복
314년 대방군 정복
372년 불교 전래
373년 율령 반포
427년 평양성 천도
475년 위례성 점령
494년 부여 병합
545년 추군과 세군의 동란
612년 살수대첩
631년 천리장성 축조
642년 연개소문 집권
645년 안시성 전투
668년 평양성 함락, 고구려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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