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더스 문명은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철기 유물이 나타나지 않아 청동기 시대의 문명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대략 기원전 2500년경 무렵 인더스강 상류 펀자브 지방의 비옥한 평야 지대에서 인더스 문명이 발생하였다고 보고 있으며 지금의 파키스탄, 인도의 펀자브 지방, 인더스강 유역에서 발달한 인도 최초의 문명입니다.
인더스 문명의 대표 유적인 하라파와 모헨조다로는 드라비다인이 건설한 것으로 보고 있는데, 이들은 성곽을 갖춘 도시 국가였으며 인더스강을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라파와 모헨조다로는 서로 물길로 연결되어 왕래하였고, 메소포타미아 지방과도 교역이 이루어졌는데요. 이들 도시는 벽돌로 쌓은 성벽을 두르고 사방으로 곧게 뻗은 포장도로와 벽돌로 만들어진 배수 시설, 공중목욕탕, 창고 등을 갖춘 계획도시였고 왕궁이나 신전은 보이지 않았지만, 규모가 큰 목욕탕이 곡물 창고, 회의장 건물과 함께 도시 중심부에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에서 종교의식을 거행하였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더불어 주민들은 동으로 만든 그릇을 사용했고 금, 상아 등으로 제작된 장신구를 사용한 거로 보이며 그림 문자를 쓰며 밀과 보리를 재배하거나 물소, 염소 등을 길렀습니다. 이를 통해 인더스 문명은 농업과 상업에 근간을 둔 고도의 도시 문명이었다는 걸 알 수 있죠.
인더스 문명의 사람들은 땅과 물 등을 섬겼는데 이 시기는 브라만 체계가 확립되기 훨씬 이전이라 후대 인도처럼 힌두교 요소는 별로 없었습니다. 수공업과 상업도 발달했으나, 농업이 가장 중요한 산업이었기에 농경에 영향을 주는 자연물들을 소중한 존재로 여겼고 특히 땅을 어머니의 모습으로 한 신으로 받들었습니다. 씨앗을 품었다가 곡식을 내주는 모습이 마치 어머니가 아기를 배고 낳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물은 농사에 꼭 필요했던 동시에 홍수를 일으키는 등 두려운 존재로서 숭배되면서도 물에는 사람의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씻겨주는 신비한 힘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습니다. 신에게 제사를 지내기 전에 반드시 물로 몸을 씻는 의식을 치렀으며 이러한 물 숭배는 현재까지 이어져 갠지스강에는 이러한 의식을 치르는 사람들도 지금도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인더스 문명의 유적에는 왕궁 같은 형태의 강한 권력을 나타내는 거주지가 없고, 관료 조직 등이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도 없으며, 귀족들의 호화로운 무덤도 없고, 기념비적 공공장소 또한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농사나 목축에 종사하는 사람들 외에 장인, 필경사, 건축가, 조각가 등 다양한 계급과 직업이 존재하는 등 대단히 복잡한 사회를 이루었다는 것은 분명하나, 국가를 형성했다는 증거는 뚜렷하지 않죠. 더불어 인류학자들은 인더스 문명이 모계 사회에 가까웠을 것으로 추정하며, 생산력의 근원인 여성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높았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인더스 문명은 제사장을 중심으로 하는 공화제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요. 사원은 따로 존재하지 않았고, 하라파와 모헨조다로에서 발견된 대목욕탕을 제외하면 종교적 의미의 시설물은 없습니다. 인더스 문명의 통치자들은 정복보다는 무역에 치중했고, 상인 계급이 통치에 직접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한 모헨조다로와 하라파를 중심으로 한 여러 유적에서는 수많은 저울추가 발견되었는데요. 추의 크기는 보석 크기를 잴 수 있을 만큼 작은 것에서 무거운 것까지 다양했습니다. 벽돌 크기도 높이, 넓이, 길이가 1:2:4 비율로 일정했는데, 이는 이 지역에 도량형이 도입되었고 이를 강제할 만한 권력이 존재했음을 암시합니다.
인더스 문명은 구운 벽돌을 사용해 대형 건물을 축조하고 벽돌로 높은 벽을 쌓는 기술을 개발했으며, 복잡한 도시 배수 체계를 구축했습니다. 모헨조다로와 돌라비라 등의 도시는 정교한 배수 체계, 집안 목욕 시설, 대목욕탕, 많은 벽 등을 갖추고 있으며 인더스 문명이 물관리를 도시 건설의 중심에 놓았음을 알려주죠. 많은 벽은 물을 청결하게 유지하는 역할을 했고, 벽돌 수로를 이용한 배수 체계는 폐수를 안전하게 처리해 주택과 도시의 오염을 방지했습니다. 또한 집안 목욕 시설은 인더스 사람들이 목욕과 청결함을 중시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데요. 대목욕탕은 중요한 의식을 위한 공간으로 도시의 지배 계층이나 엘리트들이 사용한 것으로 짐작됩니다. 대목욕탕 앞에서 동물 희생제를 올리는 데 쓰이는 벽돌 제단이 발굴이 된 후에는 대목욕탕이 희생제를 치르려고 시민들 모두가 모여서 목욕재계하는 공간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인더스 문명이 꽃피운 지역은 현재 연간 강수량 250mm이하인 매우 건조한 사막 기후이지만 인더스 문명이 융성한 시기에는 지금보다 강수량이 훨씬 많고 습한 기후였다고 합니다. 빙하기가 물러가고 급격히 따뜻해지면서 강수량이 늘어나 농사에 필요한 물을 구하기 쉬워지고, 그에 따라 인구가 인더스강을 중심으로 몰리면서 문화가 시작되고 문명으로 발전한 것으로 고고학자들은 추측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기후의 변화는 문명에 매우 큰 영향을 끼치는데, 인더스 문명이 급격히 쇠퇴한 기원전 1900년경에는 연평균 700mm가 넘던 강수량이 200mm이하로 급격히 떨어졌으며 이때부터 지금보다 더 건조한 기후가 지속되었음이 고고학 연구 결과로 확인되어, 지금껏 알려진 바와 다르게 인더스 문명 몰락에 강한 영향을 끼친 요인이 급격히 건조해진 기후이지 않았을까 하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습니다.
인더스 문명의 쇠퇴와 멸망의 원인은 분명하게 밝혀진 바는 없습니다. 다만 약 3500년경 전부터 시작된 인도 아리아인의 침입, 인더스강의 범람과 이에 따른 경로 변화, 수백만 개의 벽돌을 굽기 위한 대규모 삼림 파괴, 사라스바티강의 소멸 등이 이유로 지목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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