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얕고넓은 이야기

인류 최초의 문명, 수메르 문명

by 유한시 2022. 7. 7.

 

수메르(Sumer)는 현재까지 알려진 인류 최초의 문명으로 인류에게 있어서 글이라는 개념과 역사라는 개념이 처음으로 등장한, 인류 역사상 최초로 문자를 사용한 기록이 남아 있는 문명입니다. 서아시아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가장 남쪽 지방에 존재했던 고대 문명으로, 오늘날 이라크의 남부 지역에 해당하기 때문에 이라크 지역에 관련 유적이 집중적으로 포진되어 있습니다.

수메르 문명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으로 정확히 어디서 왔는지는 알려진 바 없으나, 수메르인은 대략 기원전 5,500년에서 기원전 4,000년 사이부터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 정주하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수메르 문명이 가장 융성했던 때는 기원전 제3천년기로, 역사학자들은 통상적으로 이 1000년의 기간을 크게 초기 왕조 시대, 아카드 왕조 시대, 우르 제3왕조 시대의 세 가지 시대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고대 수메르 문명


그 후 기원전 2000년 쯤에 유프라테스강의 서쪽 즉 아라비아에서 온 셈족 계통의 아모리인이 수메르 지방을 점령하고 고대 바빌로니아를 세움으로써 수메르 문명은 국가 형태로서는 완전히 사멸되었으나, 수메르 종교와 문화의 흔적이 바빌로니아인, 아시리아인을 비롯한 다른 민족 및 문화 집단들의 신화와 종교 그리고 문화 속에 남았습니다.

'수메르'란 말은 그들의 뒤를 이은 아카드인이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방에 사는 사람, 또는 이들이 쓰는 언어를 부르던 말입니다. 수메르인들은 자신들의 땅을 '켄기(K-en-ĝi)' 또는 '키엔기르(Ki-en-ĝir)', 곧 '고귀한 주님의 땅'이라고 불렀으며, 자신의 민족을 '웅상기가(ùĝ-saĝ-gíg-ga)', 즉 '검은 머리'라고 불렀습니다. 아카드어 '슈메루'는 아마도 '수메르어'를 뜻하는 '에메-응기(eme-ĝi)'의 방언이었으리라 추측하지만, 왜 아카드인들이 이 남쪽 땅을 '슈메루'라고 불렀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성경의 시날(Shinar), 이집트의 신그르(Sngr), 히타이트의 산하르(Sanhar)는 모두 '수메르'의 서방 방언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한때 언어학자들은 수메르어가 셈족 계통이 아닌 다른 언어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수메르 사람들이 외부에서 침입해온 침입자로 추정했었지만, 고고학적 기록을 통해 초기 우바이드기에 남부 메소포타미아에 정착한 이후 문화적인 단절 없이 그 문화가 계속 이어졌으며 기존 원주민과도 평화적인 상호 교류 끝에 서서히 융합되어 갔음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 지방에 정착한 수메르 사람들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풍부한 충적토로 비옥해진 땅을 경작했는데요. 당시에는 강우량이 현재보다 적었기 때문에, 척박한 남부 메소포타미아에 거주하려 한 모든 인종들의 도전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을 잘 관리하여 농업용수와 식수를 공급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수메르어에는 운하, 제방, 저수지 등에 관련된 단어가 많이 발견되는데, 수메르인들은 북부 지방에서 농업 기술을 습득한 뒤에 남쪽으로 내려온 농부들이었다고 합니다.

 


남부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우바이드 토기는, 북부의 사마라 유적(기원전 5700년~4900)의 토기와 연속성이 발견되는데요. 사마라 사람들은 티그리스 강 중류 지방에서 최초로 원시적인 형태의 경작을 시작한 부족들입니다. 우바이드 유적과 사마라 유적의 유사성은 라르사 근처의 텔 아웨이리에서 발견된 사마라 토기와 유사한 전기 우바이드 토기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북부 출신 농경민족이 신전 중심의 제정일치 사회 구조를 이룩하고 수자원을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기술을 습득하면서 남쪽의 보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게 되어 남쪽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입니다.

수메르는 기원전 4세기 후반까지, 10여개의 독립된 도시국가로 나뉘어 있었는데요. 도시국가들은 대체로 수로와 경계석으로 둘러싸여 있고, 중앙에는 도시의 수호신이나 수호여신을 모시는 사원이 위치하였습니다. 대부분의 도시는 엔시라고 불리는 왕이 통치하였으며, 이들 중 특히 강성한 도시국가들은 엔시보다 한 등급 더 높은 루갈을 군주의 칭호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풍속에 있어 수메르인은 매해 봄마다 수태 준비를 마친 대지에 씨를 뿌린 뒤 두무지(탐무즈)의 부활제를 올렸습니다. 그들은 두무지를 성장의 신으로서, 대지의 여신이 탐하는 남성적인 힘의 상징으로서 숭배했는데요. 이러한 풍년제 기간에는 모든 아내들이 자신의 남편뿐 아니라, 좋아하는 다른 남자와도 잘 수 있는 권리를 남편에게 인정받고 자유롭게 사랑의 상대를 선택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남편 이외의 연인과는 임신하지 않도록 스스로 주의하여 결혼의 의무를 저버리지 않도록 했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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