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얕고넓은 이야기

신라의 천년 역사 속으로

by 유한시 2022. 7. 21.

 

신라는 고구려, 백제와 함께 삼국 시대의 삼국 중 하나로, 경주 지역에서 기원전 57년 경에 건국되어 현재의 한반도 동남부 일대를 약 1000여 년 동안 지배하고 있던 국가입니다. 국호 '신라'는 왕의 덕업이 날로 새로워져서 사방을 망라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신라는 법흥왕 때 불교를 받아들여 왕권 강화와 국민의 단결을 꾀하고, 섬세하면서도 화려한 불교 유적과 유물들을 남겼습니다.

신라의 긴 역사는 크게 상대, 중대, 하대로 나눌 수 있는데요. 상대는 박혁거세 거서간부터 진덕여왕까지의 28대 771년으로, 건국 이후 부족국가에서 고대국가로의 발전 및 팽창을 하던 때로 고구려, 백제와 양립하던 시기입니다. 더불어 실제 골품 제도가 성립되고 성골이 왕위에 오르던 시기이며 신라 문화의 황금기로 해외의 여러 국가들과 교역한 시기이도 합니다.

중대는 태종 무열왕부터 혜공왕까지의 8대 127년으로, 성골 왕통이 끝나고 진골 왕통이 시작되는 시대로 무열왕계 왕실이 이어지던 시기인데요. 오랜 전쟁을 통한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과 삼국을 통일함으로써 통일왕조가 확립되어 신라의 경제와 문화의 황금기, 극성기를 이룬 시기로 볼 수 있습니다. 

하대는 선덕왕부터 경순왕까지의 20대 156년으로, 무열왕계 왕실이 끊어지고 내물왕계 진골 왕실이 성립된 시기입니다. 계속된 평화와 왕위 계승권 싸움으로 인해 혼란해져 신라가 점점 기울어가던 시기인데요.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내부의 분열과 골품제도가 붕괴되고, 족당의 형성 및 왕권의 쇠퇴로 호족과 해상세력이 등장하고 후삼국의 등장으로 신라가 약해지던 때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57년, 고조선의 유이민으로 경주에 집단을 이룬 6부촌이 자신들을 다스려줄 임금을 원하고 있을 때, 하늘에서 내려온 알에서 태어난 박혁거세를 맞이해 임금으로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는데요. 이는 경주 지역의 토착민 집단과 유이민 집단의 결합으로 해석되고 있으며, 6부촌의 협의하에 양산촌 출신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한 걸로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초기 신라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전제적, 중앙 집권적인 영역 국가가 아니라 아직 경주를 중심으로 하는 느슨한 소형 연맹체였습니다.

이 신라는 처음 진한의 소국의 하나인 사로국에서 출발하였는데요. 신라가 국가 체제를 공고히 하고 비약적인 성장을 이룬 것은 금석문에 최초로 등장하는 왕인 내물 마립간, 내물왕(재위 356년 ~ 402년) 때 입니다. 이때의 신라는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낙동강 동쪽의 진한 지역을 거의 차지하는 등 지배세력이 강화되어 중앙 집권 국가로서의 발전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또 내물 마립간 대에는 해안가로 왜의 침입이 잦았는데 여러 차례 왜의 침약을 격퇴하는데 성공했지만 399년에는 광개토대왕이 군사를 보내어 신라에 침입한 왜군을 몰아내는 등 신라는 고구려의 보호를 많이 받았습니다. 이 때문에 고구려의 군대가 신라 영토 내에 머물며 고구려의 내정 간섭을 받는 한편, 이 동안에 보다 앞선 고구려의 문화와 고구려를 통해 중국 북조의 문화를 도입하면서 차차 발전하게 됩니다. 왜와 친밀했거나 사이가 나쁘지 않았던 고구려나 백제와는 달리, 신라는 왜와는 거의 철천지원수 같은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증왕과 법흥왕 때는 국가 체제의 정비와 불교의 수용과 장려, 왕권 강화, 영토 확장 등의 국가적 사업을 연이어 성공하며 중앙 집권 국가로 변모하였고 국력이 크게 신장되었습니다. 지증왕과 법흥왕의 치세를 거치며 국력이 탄탄해진 신라는 차기 진흥왕 때 전성기에 이르게 됩니다.

지증왕 대에는 대대적으로 정치 제도가 정비되어 국력 강화를 이루었는데요. 국호를 신라로 바꾸고, 군주의 칭호도 마립간에서 왕으로 고칩니다. 또한 관등 정비, 상복 제정 등을 통해 수도와 지방의 행정 구역을 정리하고 우경법을 실시하여 식량 생산이 크게 증대되어 국력이 크게 신장합니다. 대외적으로는 우산국을 복속시키기도 하는 등 지방 세력과 주변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였습니다.

뒤이어 법흥왕은 병부를 설치하여 군제를 개혁하고, 병부의 장관인 병부령을 임명하여 군 체계를 정비하고 군사력을 강화했습니다. 더불어 율령 반포, 공복 제정 등을 통해 국가 체제를 정비해 통치 질서를 확립하고, 골품 제도를 정비하였으며 불교를 공인하는 등 주변 세력들을 포섭하여 왕권을 강화시키고자 했습니다. 또한 가야 연맹의 중심 국가인 금관가야를 병합하여 영토를 크게 확장하고 이러한 국력 신장으로 건원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자주 국가로서의 위상을 높이게 되면서 신라는 중앙 집권 국가로 변모해 나가게 됩니다.

신라는 6세기 진흥왕 때에 이르러 본격적인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는데요. 활발한 정복 활동을 전개하면서 삼국 간의 항쟁을 주도하기 시작합니다. 551년 진흥왕은 나제동맹에 있던 백제와 동시에 고구려를 공격해 한강 유역을 차지합니다. 한강 유역을 장악함으로써 경제 기반을 강화하고, 전략 거점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황해의 항구를 통하여 백제나 고구려를 거치지 않고 중국과 직접 교역할 수 있는 유리한 발판을 마련하죠. 이는 이후 신라가 삼국 경쟁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를 토대로 신라는 함경도 지역까지 진출하였으며, 남쪽으로는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서쪽을 장악하면서 진흥왕 즉위 시점보다 영토와 인구가 3배 이상 커지게 됩니다.

더불어 진흥왕은 국가 발전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기존에 존재하던 화랑도를 재편하여 국가적 조직으로 개편하고, 호국불교의 융성을 통한 국가 결속의 강화를 위해 측근들을 통해 황룡사를 비롯하여, 법주사, 화엄사 등 여러 사찰을 건립하며 불교 교단을 정비하여 사상적 통합을 도모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신라의 발전은 고구려와 백제 양국의 반격을 초래하게 되는데요. 6세기 후반까지는 진흥왕의 기세가 워낙 매서워 손에 꼽을 정도로 전쟁이 적었으며 진흥왕 사후 진지왕과 진평왕 재위 전반까지는 거의 전쟁이 없는 평화기가 지속되지만, 진평왕이 사후 성골 출신 남자 후계자가 없어 신라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이 연이어 즉위하자 이를 신라를 공격할 기회로 판단한 백제와 고구려는 신라에 대한 집중적인 공세를 시작하게 됩니다. 그렇게 642년에는 고구려와 백제의 반격으로 인해 서라벌로 향하는 관문인 대야성까지 빼앗기며 신라는 위기 상황에 몰리게 됩니다.

대야성 함락 직후 신라는 백제와의 전투에 화력을 집중하기 위해 고구려와 화친을 맺기로 결정하고 김춘추를 고구려에 사신으로 파견하지만 김춘추를 환대했던 연개소문은 백제 성충의 밀지를 받은 후 돌변해 김춘추를 투옥했고 협상은 결렬됩니다. 그 후 왜로 건너가 동맹 혹은 중립 요청을 제의하지만 거절당하고, 마지막으로 당나라로 건너가 동맹을 제의합니다. 당태종은 신라에서 차기 왕위 계승자나 마찬가지인 거물 정치인 김춘추가 사신으로 오자 당태종은 김춘추를 환대하고, 신라와 당나라는 양국이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에 대동강을 양국의 경계로 할 것을 합의하고 군사동맹을 맺게 됩니다.

한편 신라에서는 여자가 왕에 오르는 것을 반대하는 명분으로 비담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는데요. 반란은 여왕 지지파인 김유신이 진압하며 진덕여왕이 즉위하게 되지만 실권은 김춘추, 김유신이 이끄는 근왕파가 신라 정계를 거의 장악하게 됩니다.

진덕여왕 사후 왕위에 오른 김춘추, 태종 무열왕은 나당연합의 백제와 고구려 정벌을 실행에 옮길 것을 당에 촉구하였고 고종이 이에 응하여 마침내 660년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 군과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이 각각 해상과 육로로 백제 공격을 개시합니다. 백제는 이미 지속적인 전쟁으로 국력이 많이 소진한 상태에서 무리한 지배층의 문란으로 국력이 쇠퇴하고 있었고, 660년에 신라에게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멸망하게 됩니다. 또한 당시 고구려 역시 잦은 전쟁으로 국력의 소모가 심했고, 연개소문의 아들들의 갈등으로 인해 국론이 분열되어 있었는데요. 고구려는 결국 당나라의 공격으로 668년에 평양성이 함락되면서 멸망합니다.

신라는 고구려가 멸망한 후 당나라와 대결이 있을 것을 미리 예측하고 고구려와의 전투에는 소극적으로 임하면서 전력을 비축하는데요. 이때 당나라는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신라를 이용해 한반도를 장악하려는 속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당나라의 야심에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 일부와 연합하여 당나라와 정면으로 대결합니다. 신라는 건국 이래 전통대로 백제와 고구려 정복 지역에 대해서도 유화 정책을 펼쳤는데, 유화 정책은 고구려와 백제의 잔존 세력들이 신라의 편에 붙어 당나라와 싸우는 계기가 됩니다. 신라는 고구려 부흥 운동 세력을 후원하는 한편, 백제 땅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하죠.

670년 3월 신라가 옛 고구려 땅인 요동에 주둔하고 있는 당나라 군을 선제공격하면서 나당전쟁이 시작되는데요. 신라는 675년에 당나라의 20만 대군을 매소성에서 격파하여 나당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였고, 676년 11월에 금강 하구의 기벌포에서 당나라의 수군을 섬멸해 당나라의 세력을 몰아냅니다. 또한 신라는 가야, 백제, 고구려, 말갈 등 한반도에 있던 나라들을 차례로 정복하고 기벌포 해전에서 대패한 당나라 군이 한반도에서 완전히 철수하게 되면서 신라는 삼국 통일을 달성하고, 대동강부터 원산만까지를 경계로 그 이남의 한반도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합니다.

 


삼국 통일 이후 신라는 영토 확장과 함께 인구가 크게 늘어나게 되는데요. 오랜 전쟁이 끝나고 대외 관계가 안정되어 생산력이 크게 늘어납니다. 이 무렵, 신라는 중요한 정치적 변화가 생기는데요. 태종무열왕 이후에 왕권이 강화되었다는 것입니다. 태종무열왕은 최초의 진골 출신으로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큰 성과를 올려 자연스럽게 왕권을 강화하였고, 이때부터 태종무열왕의 직계 자손만이 왕위를 계승하게 됩니다.

신문왕 때에는 진골 귀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이 전제화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고, 5묘제를 설치하여 태종무열왕계의 정통성을 강화하였습니다. 이후 685년에 사지(舍知)를 설치하여 영(令)·경(卿)·대사(大舍)·사지(舍知)·사(史)의 5단계 관직제도를 완성하였으며, 가야와 백제 고위층 및 진골 고위층을 섞어서 이주시켜 만든 서원경과 주로 고구려 고위층을 이주시켜 설치한 남원경이 설치되고, 옛 고구려와 백제의 영역엔 여섯 주를 설치하여 9주 5소경 제도가 완성됩니다. 이를 바탕으로 정치와 경제, 사회 전반도 안정되었죠.

삼국통일에 힘입어 그동안 군사력에 치중하였던 역량이 내부로 쏟아지면서 신라는 화려한 전성기를 누리게 됩니다. 화려한 예술품들과 불교 예술이 이 시기에 쏟아져 나왔으며, 흔히 알고 있는 경주의 불국사와 석굴암과 같은 신라의 뛰어난 공예, 건축 문화재들이 모두 이 시기에 만들어졌습니다.

8세기 후반에 이르자 신라는 부가 크게 축적되면서 중앙 귀족들 간의 권력 투쟁이 치열해지고 국가 기강이 해이해지면서, 중앙 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됩니다. 그렇게 신라의 국운은 쇠퇴하기 시작하고 국가가 해체되는 국면에 접어들게 되는데요.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이 시기에 성장한 신라의 지방 세력을 역사적으로는 호족이라고 칭합니다.

신라의 중흥을 이끌었던 혜공왕이 죽고 상대등 김양상이 선덕왕으로 즉위한 이후 왕권은 약화되었고 귀족 세력이 다시 정계의 주도권을 잡게 되는데요. 이러한 과정에서 농민들의 부담은 과중되고, 자연재해가 잇따르며, 왕족과 귀족의 사치와 향락으로 국가 재정이 바닥나면서 백성들에 대한 강압적인 수취로 살기 어려워진 백성들은 토지를 잃고 노비가 되거나 도적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중앙 정부에 대한 불만이 높아지고 지방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반란과 쿠데타가 일어나, 중앙 정치의 불안정과 혼란이 지속됩니다.

지방 세력이 강화됨에 따라 공무역이 쇠퇴하고 9세기 중엽의 문성왕 이후 민간 무역이 활발하게 진행되는데요. 골품제로 중앙 정치 무대에 참여할 수 없었던 지방 세력은 중요한 활동 무대를 해상무역에서 찾게 됩니다. 당과의 활발한 무역으로 인해, 신라인의 왕래가 빈번한 산둥반도나 장쑤성 같은 곳에는 신라방이 생기고, 장보고 등의 해상 세력이 약진하기 시작합니다. 장보고는 해적 출몰의 방비는 물론 국제 무역을 하여 황해의 왕자가 되었고, 중앙 정치에도 관하게 되는데요. 장보고의 경우와 유사하게 지방에서 일정한 지역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권을 대를 이어가며 행사하는 세력가들이 이 시기에는 수없이 나타나게 됩니다.

9세기 이후에 나타난 신라 사회의 이러한 커다란 변화는 상업 발달에 따른 대상인의 대두와 대토지 소유의 확대로 점차 구체화됩니다. 중앙 집권 체제의 약화에 따라 지방의 토호와 귀족들은 점탈 또는 매매의 방법으로 농장을 확대하여 대지주로 성장하고 신라 지방 행정의 말단인 촌락의 인민을 통제하던 촌주 역시 토지와 인민을 다스리며 세력을 확장해 갑니다. 약화된 국가 권력은 이들 지방 세력을 규제할 수 없었고, 국가의 비호 밑에 발달한 사원도 면세 특권을 가지고 토지를 겸병, 농장을 확대해 나갑니다.

결국 10세기로 들어오면서 신라에 대한 반란을 합리화하고 지지 세력을 끌어모으기 위해 지방에서 성장하던 견훤과 궁예는 신라 말기의 혼란을 틈타 독자적인 정권을 수립하게 되는데요. 궁예가 후고구려, 견훤은 후백제를 건국함에 따라 신라는 삼국시대 말기와 삼국 통일 전쟁 때 개척한 대부분의 영토를 상실하고 삼국 시대 초반기 때의 영역인 수도 경주시와 영남권 일대로 다시 축소되어, 다시 삼국이 정립하는 후삼국시대가 전개됩니다.

후삼국시대에 들어오면서 신라는 나라의 존립을 위해 노력하지만 나날이 쇠약해져만 가는 흐름을 극복할 순 없었습니다. 그리고 930년과 934년 고려와 후백제 사이의 고창 전투, 운주 전투에서 고려가 승리하면서 한반도의 정세가 고려 쪽으로 기울자 935년 경순왕은 고려에 항복하여 고려에 흡수됨으로써 결국 신라는 멸망하게 됩니다. 하지만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와 달리 스스로 귀순함으로써 백성을 살렸고, 고려로부터 수도와 문화가 보전되었기 때문에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474년 동안 신라 왕실은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통일 신라 지도


신라(新羅)
기원전 57년 6월 8일 ~ 서기 936년 1월 8일 (약 992년)

박혁거세, 건국
황산진구 전투
황산하 전투
포상팔국의 난
신라-왜 전쟁
신라-우산국 전투
독성산성 전투
나당전쟁
달벌 전투
신라의 한강 유역 점령
가야멸망전
관산성 전투
아막성 전투
가잠성 전투
칠중성 전투
백제멸망전
북한산성 전투
과천 전투
사천 전투
평양성 전투
석문 전투
매소성 전투
일본의 신라 침공 계획
김헌창의 난
달벌대전
신라구의 일본 침입
비뇌성 전투
대야성 전투
후삼국시대
경순왕, 선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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