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얕고넓은 이야기

테스형! 소크라테스의 삶과 철학

by 유한시 2022. 7. 23.

 

소크라테스를 소재로 사용한 가수 나훈아 님의 '테스형!'이라는 곡으로 한때 큰 반향을 일으키며 많은 밈과 함께 인기를 끌었었는데요. 오늘은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로 유명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삶과 철학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소크라테스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로 기원전 469년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태어나, 일생을 철학의 문제와 관련된 토론으로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직접 어떠한 저술이나 일기를 남기지 않아 그의 제자인 플라톤이나 크세노폰, 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 등이 남긴 저술을 통해 간접적으로 그의 삶과 사상을 알 수 있습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수제자라고 볼 수 있는데, 영국의 철학자인 화이트헤드는 '서양의 2000년 철학은 모두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라고 말했으며, 시인 에머슨은 '철학은 플라톤이고, 플라톤은 철학'이라 평했었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소크라테스의 일화나 행적은 대부분이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에 근거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플라톤의 기록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석공소를 운영한 석공이자 조각가였던 소프로니코스를 아버지로, 산파였던 파이나레테를 어머니로 하는 아테네의 서민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에는 부모의 직업을 세습하던 당시 문화에 따라 아버지 밑에서 석공 기술을 배우며 철학, 기하학, 천문학 등을 공부하고 30대 후반에서 40대의 나이에 중보병으로 세 번에 걸친 전쟁에 직접 참여하게 되는데요.

당대 아테네 시민은 신체 및 정신에 장애가 있거나 만 50세를 넘지 않았다면 군 복무 의무가 있었으므로, 소크라테스도 군인으로 참여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참전한 전투는 델리온 전투가 있는데, 이때 아테네군이 패배했지만 소크라테스는 침착하게 후퇴하는 담대함을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전투에서 패닉 상태에 빠져 무질서하게 패주하면 궤멸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그가 소속된 부대는 소크라테스의 침착한 대처 덕분에 무질서하게 패주하지 않고 무사히 전장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합니다.

40대 이후에는 교육자로 청년들의 교화에 힘썼으며 기원전 406년, 500명 공회의 원로 일원이 되어 1년간 정치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고향인 아테네를 지극히 사랑했던 철학자로서, 소피스트들의 궤변에 아테네가 놀아나고 상대주의에 빠지는 모습을 보며, 이에 반발하여 보편적 지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주장하며 등장합니다.

그는 자연 철학을 배웠으나, 그 기계론적 세계관에 불만을 품게 되는데요. 그때는 아테네의 몰락기였으므로 보수적이고 귀족적인 정신과, 진보적이고 개인주의적이며 비판적 정신이 소용돌이치는 시대로 그도 이러한 경향을 지니게 되었으나 당시의 소피스트들처럼 궤변으로 진리를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태도를 배격하고,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한 진리를 찾아서 이상주의적, 목적론적인 철학을 수립하려고 하였습니다.

소크라테스 저술보다는 대화를 통해 철학 활동을 하였고, 특히 상대방에게 계속 질문을 해서 자신의 무지를 깨닫게 하는 방법을 썼는데요. 이런 질문을 중심으로 하는 교수법을 소크라테스식 문답법, 혹은 산파법(산파술)이라고 부릅니다.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의 상대주의에 맞서 장인이 장인으로서의 훌륭함(아레테)을 수행하려면 그 기능 또는 기술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하듯이, 인간으로서의 훌륭함, 즉 덕을 수행하려면 그것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때 제논의 변증법을 활용하여 논변을 진행시키는 사이에 잘못된 판단의 모순을 깨우치고 다시금 옳은 판단으로 유도시켰던 것이 바로, 산파법(산파술)입니다.

이렇게 소크라테스와 대화를 나누면서, 상대방은 이내 자신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개념이 사실은 오류가 있는 개념임을 깨닫게 되고, 당황하거나 화내거나 부끄러워하게 되는데요. 이를 아포리아(Aporia)라고 합니다.

소크라테스는 덕은 인간에 내재한다고 믿고 사람들에게 이를 깨닫게 하기 위해 온갖 계층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눔으로써 사람들에게 자신의 무지함을 일깨워 주고 용기나 정의 등에 관한 윤리상의 개념을 설교하고 다녔습니다. 그는 대화를 통해 누군가를 가르치지 않고 질문을 함으로써 자신에게 무엇이 잘못인지 깨닫게 해주었죠.

참고로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 입구에 새겨져 있는 말이기도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살아생전 중요하게 여긴 말이라고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지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의·절제·용기·경건 등을 가르쳐 많은 청년들에게 큰 감화를 끼쳤으나, 불행하게도 공포정치 시대의 참주였던 크리티아스 등의 출현이 그의 영향 때문이라는 오해를 받게 되어 '청년을 부패시키고 국가의 여러 신을 믿지 않는 자'라는 죄명으로 고소되고, 아테네 배심원들의 투표 결과 사형을 선고받고 기원전 399년, 독배를 마시며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 이후, 플라톤은 그리스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알리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가르침을 또 감명 깊게 받은 제자들 중 한 명이 바로 그 유명한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사상은 그의 제자들에게 전해져 메가라 학파, 키니코스 학파, 키레네 학파 등을 이루고, 특히 수제자인 플라톤의 관념주의로서 피어나, 그 후의 서양 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기독교 수도원 운동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산파술과 귀납적 방법론을 통해 비로소 대상에 대한 보편적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길이 열렸고, 이것이 바로 플라톤의 이데아론으로 직접적으로 계승되어, 더 나아가서는 2,600년 서양 철학사를 꿰뚫는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는 형상철학으로 이어집니다. 비록 플라톤만큼은 아닐지라도, 그 철학적 업적과 영향력은 상당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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