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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해가는 역사

유럽 중세 중기와 중세 말기

by 유한시 2022. 7. 27.

 

중세 중기는 유럽의 역사에서 보통 11세기부터 13세기 후반까지를 말합니다. 중세 중기의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인구의 변동인데요. 중세 초기와 사회적, 정치적으로 다르게 변화하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1250년경, 유럽의 인구 급증은 유럽의 경제의 영향을 크게 끼쳤고 이는 19세기 이전까지는 볼 수 없었던 현상입니다. 이러한 인구 증가 추세는 흑사병과 전쟁, 경제 위기가 확연히 드러나는 중세 말기와도 확연한 차이를 보입니다. 현재까지 내려오는 주요한 유럽의 국가들이 대체로 나타난 시기이며 널리 알려진 중세의 이미지는 중세 중기에 가장 가깝습니다.

10~18세기의 유럽에서 특징적인 사건은 노르만의 영국 정복을 비롯해 세속적 왕권 대 교황권의 대립과 회교도 국가에 대한 그리스도교 국가의 반격이 시작되었다는 것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스칸디나비아반도에 있던 게르만계의 노르만인은 그들의 발달한 항해술과 약탈 행위로 유럽 여러 나라를 괴롭히더니, 1366년에는 영국을 점령하고 이어 대륙에서의 영토 문제를 둘러싸고 프랑스와 빈번히 대립하였습니다. 한편 중국사에서 흉노로 알려진 훈족 계통의 마자르족이 헝가리 왕국을, 서슬라브족이 폴란드 왕국을 건국했던 것도 이 무렵의 일입니다.

또한 로마 교황의 독립과 더불어 게르만족의 새로운 강대국이었던 프랑크 왕국을 포교함으로써 유럽의 새로운 강대국이 등장하였고 이를 이은 신성로마제국이 등장함에 따라 기존의 패권국가였던 동로마 제국이 패권을 상실하였으며 유럽은 신성로마제국, 동로마 제국이 두 나라 경쟁 구도로 재편되게 됩니다. 또한 셀주크 튀르크의 등장과 더불어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대패한 동로마 제국은 제국의 중심이었던 아나톨리아를 모두 상실하여 강대국으로서의 정체성만 유지할 수 있게 되었지만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강대국으로서의 면모를 상실함과 더불어 몰락해버립니다.

 


십자군 전쟁이 일어난 배경을 살펴보면, 그리스 정교회와 로마가톨릭교회의 분열에도 불구하고 종교계의 지배자인 가톨릭 교황의 권력이 강대해졌으며 이에 최고 권력자인 신성 로마 황제와의 사이에 권력투쟁이 전개되는데요. 성직의 서임을 둘러싸고 법황 그레고리 7세와 하인리히 4세 사이에 벌어졌던 정면충돌이 당시 상황의 두드러진 예입니다. 이 충돌의 결과로 헨리 4세는 카노사에서 그레고리 7세에게 항복하게 됩니다. 이 사건 이후 교황권이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강화됐지만, 황권은 점차 쇠퇴하게 되는데요. 강대한 교황권을 바탕으로 그리스도교권 국가가 회교권 국가에 반격을 가하기 시작한 것이 십자군의 원정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회교도들에게 점령된 성지 예루살렘의 탈환과 동로마 구원의 명분을 가졌던 십자군 원정은 1296년에서 1300년에 이르기까지 3회에 걸쳐서 단행되었으며 이 십자군 원정은 후세의 정치, 경제, 교통 등 여러 방면으로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중세 중기 시기에 가장 널리 알려진 사건은 방금 설명해 드린 십자군 전쟁이며 그 밖에 윌리엄 1세의 잉글랜드 정복으로 노르만 왕조 성립, 기사도의 성립, 동서 교회 대분열, 스칸디나비아를 포함한 전 유럽에 기독교 전파, 몽골의 침략, 헝가리와 폴란드 왕국의 성립, 고딕 양식의 등장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중세 말기는 유럽의 14세기 초부터 약 15세기까지를 의미합니다. 1300년 유럽 전역에서는 기근과 흑사병이 창궐하기 시작한다. 흑사병으로 인해 유럽 인구가 급감하기 시작하고 이러한 인구감소는 사회불안과 폭동을 야기합니다.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경우, 소작농들이 자주 난을 일으켰는데 대표적인 사건으로는 자크리의 난과 와트 타일러의 난이 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백년전쟁까지 발발하게 됩니다. 게다가 기독교의 서방 교회 분열로 로마와 아비뇽에 교황이 두 명이 있게 되는 사건까지 생기면서 이를 서양 역사가들은 중세 말기의 수난이라고 일컫습니다. 하지만 비록 이러한 혼란이 있다고 해도 14세기에는 르네상스가 등장하며 과학과 예술 분야에서는 여러 진보적인 성과가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십자군 운동의 실패로 실추된 교황권이나 황제권을 대신하여 왕권이 강화됩니다. 이리하여 관료제와 상비군을 정비하고 사치하기 위해 과세 증가가 기도되었으나 이를 견제하려는 도시인의 정치적 발언권과 충돌한 끝에 마침내 성직 귀족, 세속 귀족, 도시민을 대표하는 영국의 자문 의회나 프랑스의 삼부회 같은 신분제 의회를 가지게 되어 중세 국가는 신분제 국가로 변모하는데요.

이러한 배경하에 왕국이 왕위 계승 문제를 대두하여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는 백년 전쟁이 일어났고, 결과는 프랑스 왕국의 승리로 프랑스 왕국이 강대국 반열에 오르게 되었으며 또한 프랑스 왕의 권력이 상승하게 됩니다. 그리고 백년전쟁이 발생하기도 전인 1309년에 아비뇽 유수가 발생하여 교황권이 약화하였죠. 이러한 교권의 쇠퇴와 왕권의 강화는 각국의 사정에 따라서 그 성격도 달랐는데요.

귀족 세력이 강했던 독일은 연방제 국가를 이루었고, 상업 자본이 축적되었던 이탈리아에서는 데스포트와 같은 전제군주제가 실현되었으며, 이베리아반도에서는 이슬람 세력에의 대결의 필요성으로 그리스도교국을 건설합니다. 한편 이슬람 세력의 공격을 막으며 서유럽의 방패가 되었던 동로마 제국은 재흥 된 뒤에도 계속된 위협하에 쇠퇴하기 시작합니다.

이베리아반도에서는 초기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중심으로 이슬람의 우마이야 왕조에 빼앗긴 기독교 세계를 되찾는다는 목적의 레콘키스타가 결실을 보게 되었으며 그중에서 대표적인 국가였던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이 혼인 동맹을 맺고 이후 두 국가가 동군연합으로 묶여 새로운 강대국인 스페인 왕국이 등장함과 더불어 대항해 시대의 선두 주자로 자리매김합니다.

 

1328년 유럽대륙과 지중해영역


한편 신성로마제국 내부에서는 농민에 대한 탄압과 더불어 성직자의 부패로 인해 종교 개혁이 일어나게 되고 이에 따라 30년 전쟁을 거치면서 신성로마제국은 사실상 내부 분열이 일어나 '황제 중심의 가톨릭' vs '개신교 선제후국을 중심의 연합'으로 분열하게 됩니다. 하지만 황제의 처신으로 인해 제국은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지만 사실상 황제가 제국 내의 일부 권역에서 세력을 펼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동로마 제국이 몰락하여 지역 강국으로서의 면모를 간간이 비추고 있었지만 오스만 제국의 성장과 더불어 십자군이 바르나 전투에서 패배하여 사실상 도시국가로 전락하고 1453년에 오스만 제국에게 멸망합니다. 동로마 제국의 멸망은 곧 기독교 세계의 위기감을 조성하였고 그 대상으로 오스만 제국에 대한 무역 금지를 조치하게 됩니다. 오스만 제국에 의해 동쪽 길이 막히고 나서 신 항로를 개척해야만 했는데요. 새로운 무역로를 찾기 위해 대항해 시대가 도래하였고 동로마 제국의 인본주의가 이탈리아반도로 건너가 르네상스를 꽃피우게 됩니다.

12세기의 르네상스의 경우 십자군 전쟁 이후 그리스 학자들이 피신을 오면서 시작되었고, 이는 오스만 제국의 콘스탄티노플 점령 이후 가속화되어 비잔틴 제국의 학자들이 서방으로 피난지를 찾으면서 르네상스를 앞당겼습니다. 특히 이탈리아반도의 경우 더욱 그랬으며 이러한 고전의 지식과 인쇄술이 결합하면서 이는 종교 개혁을 이끌었고, 중세 말기 무렵에는 대항해시대를 열기도 했습니다.

콜럼버스의 경우 1492년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으며, 바스쿠 다 가마의 경우 인도와 아프리카의 해안을 따라 1498년 항로를 개척했습니다. 이 사건들은 유럽의 국가들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증강하는 발견이었으며 이러한 변화는 중세와 근대 사이를 연결해 주는 근세 시대를 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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