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얕고넓은 이야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생애

by 유한시 2022. 7. 4.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인 인물로 꼽히며 다재다능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천재적인 인물로 많이 표현되는데요. 대표적인 작품인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 비트루비우스적 인간은 교과서는 물론 다양한 곳에서도 많이 소개되기 때문에 다들 한 번씩은 보셨을 것 같습니다.

 


본명 '레오나르도 디 세르 피에로 다 빈치(Leonardo di ser Piero da Vinci, 1452년 4월 15일 - 1519년 5월 2일)'는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이자 조각가, 발명가, 건축가, 기술자, 해부학자, 지리학자, 음악가, 과학자, 공학가, 수학자, 외교관, 천문학자, 식물학자, 동물학자, 역사가, 집필가 등 다양한 방면에서 활약한 다재다능한 천재이며 역사상 가장 창의적인 위대한 르네상스인으로 불립니다. 심지어 외모와 목소리도 빼어나고 키도 매우 컸다고 하네요. 2007년 11월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저명하다고 평가되는 영국의 과학기술지인 '네이처(nature)'에서 인류 역사를 바꾼 10명의 천재 중 역사상 가장 창의적인 인물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1위로 선정하기도 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1452년 4월 15일 토요일 밤 3시경 피렌체 공화국 토스카나 지방의 산골 마을 빈치(Vinci)에서 태어났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태어난 시간까지 정확히 알려질 수 있었던 건 그의 할아버지인 안토니오의 직업 습관 덕분이라고 하는데요. 그의 조부는 중요한 일이 생기면 노트 뒤 여백에 기록해두곤 하였다고 합니다.

레오나르도는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은 부모인 변호사 아버지 안토니오 피에로와 농민이었던 어머니 카타리나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였는데요. 부친은 법률가들을 배출한 지주 가문의 출신이었고 생모는 지참금을 낼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기에 결혼까지는 이어지지 못했다고 전해집니다. 레오나르도가 태어난 처음엔 어머니의 집에 살다 결혼한 아버지가 계모 알비에라 사이에서 자식을 얻지 못하자 5~6살이 돼서 아버지의 집에 가서 살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레오나르도를 돌봐준 것은 아버지보다는 조부모와 숙부였다고 합니다.

1466년 아버지인 안토니오 피에로가 레오나르도의 재능을 알게 되고, 열네 살쯤 가족과 함께 피렌체로 이사를 가 안토니오 델 베로키오의 공방에 들어가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베로키오는 당시에 피렌체에서 가장 유명한 공방을 운영하던 실력 있는 예술가였습니다. 레오나르도는 베로키오의 공방에서 20대 초반까지 미술 및 기술 공작 수업을 받았는데, 20살이 되어 조수로 참여한 베로키오의 그림 <그리스도의 세례> 좌측에 꼬마 천사 두 명을 맡아 그렸고 당시에 일반적인 템페라 기법에 새로 알려지기 시작한 유화를 섞어 실험적인 그림을 그리며 그 천재성을 보입니다. 이 그림을 그린 이후 베로키오는 레오나르도를 화가 길드였던 성 루카 조합에 정식으로 가입시켜주게 했습니다. 더불어 제자의 재능을 알아본 베로키오는 레오나르도에게 그림을 맡기고, 자신은 조각에만 몰두할 정도로 레오나르도를 화가로서 존중했다고 합니다.

 


30살이 된 1482년 레오나르도는 밀라노 공국에서 활동을 시작하게 되는데 밀라노에 간 목적은 스포르차가의 선조인 프란체스코의 기마상 제작과 음악 교수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밀라노 공이었던 루도비코 스포르차가 레오나르도를 지원하면서 약 17년 동안 화가로서뿐만 아니라 조각가, 건축가, 기사로서 오늘날 잘 알려진 레오나르도의 다방면에 걸친 천재성을 발휘하게 되는데요. 

이 시기에 세계 미술사에서 가장 뛰어난 그림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암굴의 성모>나 <기마상> 등이 이때 만들어졌고, 그중 가장 유명한 건 <최후의 만찬>입니다. 〈암굴의 성모〉에서는 레오나르도 특유의 화법인 스푸마토(Sfumato)를 처음 선보이게 되며, 이후 이 화법을 바탕으로 여러분도 잘 알고 있는 〈모나리자〉가 그려지게 되죠. 스푸마토는 원거리에서 물체를 둘러싼 공기까지 그림으로써 완전한 삼차원의 세계를 그리는 기법으로 대기 원근법이라고도 불립니다.

1499년, 프랑스 왕국의 루이 12세의 밀라노 침입으로 인해 레오나르도를 지원하던 루도비코는 프랑스에 투옥되며 밀라노 정세가 불안정해지면서 레오나르도는 1500년 피렌체로 다시 돌아오게 되는데요. 여기서 <성 모자와 성 안나> 제단화를 그린 것을 시작으로 인체 비례도, 헬리콥터, 지질학과 물의 운동 등 레오나르도의 과학자, 기술자적 면모를 보여주는 수많은 연구 기록까지 남기게 됩니다. 1503년에는 피렌체 시청의 벽화를 의뢰받아 <앙기아리 전투>를 작업했는데, 재밌는 건 옆편 벽에서 라이벌이라고 불렸던 미켈란젤로가 <카시나 전투>를 그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이때 레오나르도는 바로 그 유명한 <모나리자>를 그리기 시작하죠.

모나리자


1506년에는 당시 프랑스 왕이었던 루이 12세의 요청을 받고 밀라노에서 궁정 화가가 되었는데, 밀라노를 떠나는 1513년까지 레오나르도는 다양한 작업과 연구를 하면서 지내게 됩니다. 이후 1516년, 선왕 루이 12세를 통해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던 프랑수아 1세의 초청으로 제자 프란체스코 멜치와 함께 알프스를 넘어 프랑스 앙부아즈로 향합니다. 프랑수아 1세는 앙부아즈성과 가까운 클로 뤼세 성을 마련해 주고, 레오나르도는 생애의 마지막 3년을 보낸 이곳에서 <성 안나와 성모자>와 <모나리자>를 완성합니다.

1519년 4월 23일 죽음을 직감한 듯 그는 유언장을 작성하였는데요. 레오나르도는 유언장에서 사후에 프랑스에 묻히길 바라며 밀라노 공작에게 받은 포도밭을 그의 연인인 안드레아 살라이와 하인 바티스타에게 반씩 나누어 상속하였습니다. 또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그림과 메모가 적힌 노트들은 그의 제자인 프란체스코 멜치에게 상속한다는 내용 등을 기록하였는데요. 1570년 멜치의 사망 이후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엄청난 양의 크로키와 그림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죠.

유언장 작성 후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1519년 5월 2일, 그의 나이 67세에 자신의 저택에서 숨을 거두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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